채씨는 고려국 중엽(AD1,100~1,200)에 창성(創姓)하고 3, 4백년 후 조선국 중엽 13대 명종조(AD 1545~1567)때에 족보간행이 시작되면서 뒤늦게 우리도 족보가 창간되었다.(가첩·가승은 고려 숙종 때인 AD 1100년경부터 시작됨)

 

창성한 지 3, 4백년이 경과한 후의 간행으로 창성연원(創姓淵源)에 대하여는 이런 저런 전설과 고사전기(古史傳記)를 수록하였을 뿐 그 유래를 체계화하지는 못하였다.

 

전설과 전기가 많다는 것은 불확실을 뜻하는 것이고 우리 선조님들도 국내 창성인지 도래성(渡來姓)인지 명확히 밝히지는 못하고 창간 당시 수집된 자료에 의하여 연계 가능한 시점에서 시조(始祖)를 설정하여 족보를 편집 발행하였는 바 추측컨대 그 당시 문헌(文獻)이 빈약했던 것은 아마도 고려 24대 의종때 무신의 난(정중부의 난:AD 1170)으로 모든 문헌이 남김없이 불에 타고 문인(文人)과 문신(文臣)들이 모조리 죽음으로써 사료(史料)가 전무했던 것이 큰 원인이었을 것인바 그 당시의 전설과 고사전기는 선조님들의 유훈으로 간직하고 이제는 세계가 하나의 생활권으로 변천하였으므로 온고지신(溫故知新) 차원에서 세계속의 문헌을 추적하여서라도 객관성 있는 연원을 고증하는데 초점을 심어갔으면 한다.

 

원래 성씨 사용은 초기에는 왕실이나 귀족에게만 국한되었다가 그 후 국가에 공이 큰 공신이나 귀화인(歸化人) 즉 도래인(渡來人)들에게 세거지역이나 강과 산의 명칭을 따라 사성(賜姓:나라에서 성을 내려 줌) 하면서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일반 서민들이 성씨를 사용하게 된 것은 과거제도가 시작되는 고려 11대 문종(AD 1047년) 때부터 보편화되었으며 상민(常民)과 노비(奴婢)가 성씨를 갖게 된 것은 조선조 말엽 개혁정치가 시작되면서 부터이다.

 

우리 채씨는 평강, 인천, 고성(후에 음성), 광주, 이천, 함안, 인동, 강진 등의 다수였으나 옛날 선대부터 동원분파(同源分派)로 알려져 있으며 분파 연대와 계보(系譜)를 고증하지 못하여 계촌(計寸)을 못하는 한(恨)을 안고 살아온 혈통종족(血統宗族)으로 수백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성동본과 같이 통혼(通婚)도 절대적으로 금하여 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경우를 생각해도 연원 추적은 불가피한 숙원(宿願)이기도 하다.

 

세계 속의 문헌을 광범위하게 접할 수 있는 오늘에 당하여 우리들 숙원을 고증하는데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도 되었으면 하고 종친간의 유대와 족정장류(族情長流)를 목적으로 이 채씨 종사(宗史)를 간결하게 발췌 수록하는바 여기에는 채씨의 근원도 더듬어 보고 자랑스런 현조(顯祖)님들의 위업(偉業)과 일화(逸話)도 게재하였다.

 

뿌리의 연원(淵源)을 대략이라도 알므로서 씨족의 위상을 바로 세우고 후손들이 숭조(崇祖)하는 기풍을 길이 길이 다져서 그래서 채씨의 창달을 기원하면서 이 한조각 장이 가치있게 활용되는 씨족사(氏族史)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메마른 산에 나무를 심고 잘 자라서 푸른동산이 되길 염원하듯 미래의 부푼 꿈을 안고 빈약한 식견이지만 간추리고 다듬어서 이 종사를 편집하였다.

 

끝으로 이종사 편집을 적극 권유하고 협조하여 주신 중앙종친회 채상현(蔡相鉉)회장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편집인(編輯人)  채달석(蔡達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