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씨의 기원(起源)은 중국과 왕래한 이후로서 중국 문화와 접촉하는데서 시작되었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인명(人名)을 찾아봐도 고구려는 20대 장수왕(長壽王)때 (413AD) 백제는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때(346AD) 신라는 24대 진흥왕(眞興王)때 (540AD)부터 성을 사용하였고 그 이전에는 왕족이나 귀족을 제외하고는 사회적으로 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성을 널리 쓰게 된것은 고려 중엽(高麗 中葉)고려 11대 문종(文宗)때 (1046AD)부터 사용해서 이때 성씨가 없는자는 과거에도 응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성씨를 갖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고려 15대 숙종(肅宗)때 (1095AD)부터는 성씨마다 가첩(家牒)이나 가승(家乘) 또는 족보(族譜)가 시작되었고 성씨 종적(宗籍)이 없으면 상민(常民)으로 떨어져 군역(軍役)을 치뤄야하고 사회적인 차별(천민)을 받았다.

 

득성(得姓) 및 득본(得本:本貫)의 유래

우리나라 성씨(姓氏)는 혈연(血緣)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내려오면서 민족의 역사와 함께 사회적(社會的) 문화적(文化的) 정치적(政治的) 역할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혈맥(血脈)으로 이어져 온 성씨의 전통사상(傳統思想)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조상숭배사상(祖上崇拜思想)을 고취(鼓吹)시키고 인륜도덕(人倫道德)을 중요시하는 문화민족(文化民族)으로서의 긍지(矜持)를 갖게 하였다.

 

성씨(姓氏)의 근원지(根源地)는 문헌(文獻)에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조선시대(古朝鮮時代)에 왕실(王室)에서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혈통(血統)을 중심으로 원시공동사회(原始共同社會)가 형성됨에 따라 통솔에 필요한 기능과 다른 씨족과의 구별을 호칭한 것이 성(姓)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채씨(蔡氏)의 득성(得姓)에 관하여는 전래(傳來)되는 문헌(文獻)이 부족하여 정확한 고증(考證)이 불가능하고 여러가지 자생설(自生說)이 있으나 신화(神話) 같은 전설로 믿기 어려우며 사성(賜姓)된 기록이 없으므로 통설(通說)과 같이 도래성(渡來姓)으로 봄이 지극히 타당하지만 어느 시기에 어떠한 사유로 우리나라에 와서 정착(定着)하게 되었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중국하남성(中國河南省)에 건국(建國)한 채국(蔡國)이 수 백년간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하다가 기원전 477년 주변국(周邊國)의 침공으로 멸망한 후 채씨(蔡氏)들이 여러 국가로 진출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는 설이 있고.

 

춘추시대(春秋時代)때 기자(箕子)를 따라 우리나라에 온 채림(蔡琳)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채원광(蔡元光)이 신라 17대 내물왕(서기356~402)의 부마(駙馬)였고 그 후손인 채한보(蔡漢輔․蔡輔漢)가 귀화(歸化)함으로써 그 후손이 우리나라의 채씨(蔡氏)라는 설이 있으나 근년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의 채씨(蔡氏)들은 물론이고 주변국가에 거주하는 채씨(蔡氏)들 모두가 한국의 채씨(蔡氏)는 중국하남성(中國河南省)에 뿌리를 둔 채씨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과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의 채성(蔡姓)은 시기를 알 수 없는 옛날에 중국에서 건너온 도래성(渡來姓)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믿어지나 고거(考據) 할 수 없다. 선인(先人)들께서 수 백년동안 득성(得姓)의 유래(由來)를 밝히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나 현재까지 명확한 근거를 찾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