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 주나라 문왕의 다섯째아들 채숙도공의 후손이 도래(渡來)하여 시조가 되었다.

 

2. 중국인으로 우리나라에 귀화(歸化)한 채보한(蔡輔漢)이 신라 17대 내물왕(奈勿王)의 부마(駙馬=사위)가 되어 채씨 시조가 되었다. (356~402AD)

 

3. 채보한의 후손으로 백년, 천년, 만년(百年, 千年, 萬年)이란 세분이 모두 정승이었고 이름은 3형제 같으나 부자 조손(父子 祖孫)3대이고

 

4. 한로(漢老), 중엄(仲淹=문림랑사재동정:文林郞司宰同正), 자신(自莘=감찰규정:監察糾正)세분도 채보한의 후손이었다는 것.

 

5. 채원광(蔡元光) 강원도 평강현(현 평강군)에 있는 향교(鄕校)옆 석탑(石塔)에 명관 채원광(蔡元光) 정승으로 각자(刻字)되어 있어 채씨 시조라는것(혹 채보한과 동일인(同一人)이 아닌가 사료되고 성씨 대관에는 평강채씨 시조로 기록되고 있음)

 

6. 채경연(蔡敬延:감찰규정)그 아들 채방(蔡邦:검교신호위 대장군:檢校神虎衛大將軍), 그 손자 채수갑(蔡壽甲:문림랑사재동정), 그 증손자 채영(蔡泳:문림랑시태묘령:文林郞試太廟令)의 4대가 채보한의 후손으로 평강채씨 시조 채송년의 윗대라는 기록은 있으나 채보한으로부터 채송년까지는 800여년(356~1251AD)이 경과하였는데 7~10대의 성명과 관직만 나타나고 계대(計代)가 불분명하여 부득이 채송년을 평강채씨 시조로 하여 족보를 창간한다는 족보창간자 채충원(당시 경주부윤 종2품관)의 기록이 있고

 

7. 금사 채송년(金使 蔡松年) 고려 18대 의종(毅宗) 2년(1148AD)무진 5월경오일에 금 (金:여진족이 거란을 멸하고 송나라를 쳐 화북(華北)을 정복하고 세운나라)나라 사신 완안종안(完顔宗安)과 예부시랑 채송년(禮部侍郞 蔡松年)이 고려에 와서 고려왕 의종(毅宗)을 금나라 예속국(隸屬國)으로 개의부동삼사상주국고려왕(開儀府同三司上柱國高麗王)으로 책봉하였다는 설화도 있으나 평강시조 채송년이 졸한 연대가 23대 고종 38년(1251AD)이므로 103년 전이란 오차가 있어 이때의 채송년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분명하다.(고려사 세가(世家)권 제17 의종편:毅宗編)

※ 평강채씨시조 채송년 기록

    고려사 열전(列傳)권 15~102, 고려사 세가(世家)권22, 23, 24의 고종 15, 17, 18, 23, 38년 참조

 

8. 충현, 충순, 충희(忠顯, 忠順, 忠禧) 고려 7대왕 목종(穆宗)때 (998~1008AD) 평강백(平康伯)의 봉작(封爵)을 받은 예부상서(禮部尙書=6부의 으뜸벼슬로 정3품) 충현(忠顯)과 8대왕 현종(顯宗)때(1009~1031AD) 소성백(邵城伯=소성은 仁川의 옛 지명)의 봉작을 받은 이부상서(吏部尙書) 충순(忠順)과 9대왕 덕종(德宗)때(1032~1034) 고성백(固城伯=음성)의 봉작을 받은 합문지후(閤門祗侯=합문의 정7품) 충희(忠禧)등 3형제가 있었는바 백씨 충현은 평강채씨 시조이고 중씨 충순은 인천 채씨 시조요 계씨 충희는 고성 채씨(후에 음성 채씨)의 시조라는데 그중 충순 한분의 “고려사”기록을 옮겨 본다.

 

8-1 채충순(蔡忠順)은 고려 10대왕 정종(靖宗=덕종 다음 왕으로 덕종의 동생임)때(1036AD)의 대신(大臣)으로 시호(諡號)는 정간(貞簡)이다. 목종때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유명(遺命=국왕이 임종할때의 유언)을 받아 김치양(金致陽)등의 역신(逆臣=반역자)을 제거하고 최항(崔沆)등과 함께 대량원군순(大良院君詢)을 현종(顯宗)으로 영입(迎立)했다. 현종 1년(1010AD) 글안(契丹)이 침범할때 현종을 모시고 나주(羅州)까지 피난했다가 돌아와서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이 되고 현종 12년(1021AD)에는 제양현개국자(濟陽縣開國子)에 봉해지고 뒤에 다시 보국공신(輔國功臣)이 추가되고 18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로 승진하였다. 현종 21년(1030AD) 판서경유수사(判西京留守事:종1품)가 되어 재임하다가 치사(致仕=고령 고관으로 사임함)하고 정종(靖宗) 2년 1036 4월에 졸하다.

☆  서경은 지금의 평양, 동경은 지금의 경주, 남경은 지금의 서울, 중경은 그때의 수도 개성임)

    <채충순(蔡忠順)은 고려사 세가(世家)권 4, 5, 6 현종·정종(顯宗, 靖宗)편에 소상하게 기록되고 있다.>

 

9. 채송년(蔡松年) 고려 중엽(21대 희종:熙宗 년대로 추정:1204AD)평강에 사는 명문대가의 규수(閨秀=처녀)가 결혼전에 임신하자 부모가 캐어 물으니 밤만되면 낯모르는 옥골신선이 나타나 동침하고 새벽이면 종적을 감추었다. 하루밤에는 종적을 알고자 명주실 꾸리에 바늘을 꽂아 신선의 도포자락에 꽂아 놓고 날이 밝자 그 명주실을 추적해보니 계곡에 있는 연못으로 들어간것을 발견하고 끌어 당겨보니 의외로 오색이 영롱한 큰 거북이 끌려 나오고 그 등에는 바늘이 꽂혀 있음을 목격하고 거북의 화신(化身)임을 알았으며 그후 규수가 평생해로코자 하는 욕심에서 추적사실을 이실직고한바 천기누설을 책망하고 종적을 감추었다. 그후 옥동자를 낳았는바 위와 같은 사실을 국왕이 듣고 성을 채(蔡)로 본관은 평강(平康)이라 사성(賜姓)하였다.

    이 아이가 장성하여 입신양명하고 평강백의 봉작을 받았으며 평강채씨의 시조가 되었다는바 그래서 채씨의 상징이 거북이라 전해온다.<전고대방(典故大方)에도 유사 내용이 있다> 또 일설에는 신선이 새벽이면 나가는 것을 규수가 제지하고 부모에게 보인바 부모는 즉시 택일하여 혼사를 치루었다.  그후 옥동자를 낳았는바 그후 어느날 신선이 부인에게 목욕준비를 시키고 자신의 목욕중에는 절대 봐서는 아니된다고 하였으나 이에 더욱 궁금한 부인이 문틈으로 엿본바 사람이 아닌 흑룡(黑龍=검은 용)이 방안에서 목욕하고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신선이 보지말라는 것을 보았으니 우리 인연이 끝났다. 아들의 성은 채씨로 하라는 말만 남기고 작별을 고하고 떠났다. 규수의 아버지가 이말을 듣고 문천(文川)까지 추적하였으나 종적이 없고 아들은 성장하여 채씨의 시조가 되었다.(거북 전설의 변형이 아닌가 사료되며 실존 채송년을 미화한 신화설이 아닌가도 추정됨)

 

10. 중국 상고대(上古代) 고신씨(高辛氏=제곡:帝嚳먼옛날 중국 5제의 한사람)의 아들인 사도(司徒) 설(契)의 후손이 은나라가 망하자 기자(箕子=은나라 마지막 황제 주왕(紂王)의 숙부)를 따라 우리나라에 와서 정착하면서 채씨가 되었다는 것.

※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사실이 아닌 전설인듯하고 중국에 채성이 발원한 연대는 1108BC이며 기자 동래 시기는 1122BC이전임으로 연대도 불부합하고 있슴.

 

11. 신라때 당(唐)나라에서 8학사(學士)가 우리나라에 건너왔는데 그중 한사람이 채씨로 귀화(歸化)해서 정착했다는 것.

 

12. 안협현(安峽縣=현재의 강원도 이천군으로 평강군과 인접하고 있슴)에 평강채씨 묘역(墓域)이 있는데 그중에는 인천백(仁川伯)의 묘갈(墓碣=작은 비석)이 있다는 것.

 

13. 평강현에 평강, 인천 양문(兩門)의 묘역이 있는데 산은 문산(文山)이고 분묘앞을 흐르는 개천은 문천(文川)이라 그 때문에 양가문에 문장가가 많히 배출(輩出)하였다는 것.

 

14. 채정(蔡靖) 고려 고종 6년(1219AD )음성 이속(陰城 吏屬)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동도 장서기(東都=경주 掌書記=문관)가 되어 선치하였고 국학학정(國學學正)으로 영전되어 7관(국학의 7개 문과)의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신종(神宗)때에는 진양목(晋陽牧=진주 목사)을 지냈고 동도(東都=경주)와 영천(永川)지방에 반란이 일어나자 이때 동도유수부사(東都留守副使)로 임명되어 단기(單騎)로 임지에 이르매 난적들이 해산하고 안정되었다. 고종초에 서도유수(西都留守=평양감사격으로 종2품)로 영전하였고 그후 추밀원(樞密院=왕명출납관청)부사로 재임중 치사(致仕)하고 죽었다.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국장(國葬)을 치루었다고 한다.(고려사에 수록되어 있으며 아마도 음성 채씨의 선대나 시조가 아닌가 한다.)

 

15. 이외에도 이런저런 채씨 발원에 대한 전설과 고사전기(古史傳記)는 수없이 많으나 그 유래를 체계화하지는 못하였다. 전설과 전기가 많다는 것은 확실치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우리 선조님들도 채씨가 국내 창성(創姓)인지 도래성(渡來姓)인지를 밝히지 못하고 기록이 연속되는 싯점부터 시조(始祖)를 설정하였다.

    본래 각 성씨의 시조 탄생에 대하여는 가지가지 신기한 전설이 따르는게 항례(恒例)이므로 하등 기이(奇異)할것이 없으며 박씨의 시조 박혁거세,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 김해 김씨의 시조 김수로왕등이 알에서 나왔다는 난생설(卵生說)은 그중 대표적인 예 이지만 그 밖에 파평 윤씨의 파평의 연못에서 잉어(鯉魚)가 나왔는데 겨드랑이에 80개의 비늘이 있었다는 파평윤씨 시조 전설이나 남평(전남 나주)땅의 장진연못가의 바위에 내려왔다는 남평 문씨의 시조 전설이나 또 본성이 지(池)였다가 겨드랑이에 비늘이 셋이 있어 고려 태조가 어(魚)씨로 사성(賜姓)했다는 충주어씨 시조 전설이나 이천서씨(利川 徐氏)시조의 사슴의 전설 등은 우리 채씨의 전설과 궤(軌)를 같이하는 것으로 흥미롭다.

    이와 같이 선조 유래를 체계화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고려 18대왕 의종조때 무신의 난(정중부의 난)으로 문신들을 모조리 죽이고 문헌(文獻)들을 남김없이 불사른데 큰 원인도 있었을 것인바 이렇게 수많은 전설과 전기는 온고차원(溫故次元)에서 선조님의 유훈으로 삼아 구보(옛 족보)에 소중히 간직하고 보존해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