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조(1세) 송년(松年)은 고려 23대 고종조(1214~1259)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삼사태사(三師太師),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상호군(上護軍), 판이부사(判吏部事),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역임하고 고종 38년 1251에 졸하였는바 시호(諡號:제왕, 상공, 유현에게 사후 공덕을 칭송하여 추증하는 칭호)는 경평(景平)이다.

① 고종 15년(1228) 무자 9월 병신일에 청색진(淸塞津)의 호장(戶長)이 용주(龍州)호장과 같이 반란을 일으켰을때 병마사로 출정하여 진압 평정하다.

② 고종 17년(1230)경인에 최향(崔珦)의 난에 병마사로 출정하여 이를 평정한후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③ 고종 18년(1231) 신묘 8월, 임오일에 몽고 장군 살례탑(撒禮塔)이 평안, 황해, 경기 지방을 침략하였을때 대장군으로서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가 되어 이를 평정하다.

④ 고종 23년(1236) 병신 2월 임인일에 추밀원(樞密院)부사가 되다.

⑤ 고종 38년(1251) 신해 윤10월 갑신일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졸하다.

    고려사 열전 권 15~102, 고려사 세가 권 22, 23, 24의 고종 15, 17, 18 23, 38년 참조

묘소는 강원도 평강군 유진면 적전리 금벌동 간좌(江原道 平康郡 楡津面 赤田里 金伐洞 艮坐)에 있으나 국토 분단 이후인 1966년에 24세손 규상(奎象)의 주관으로 군산시 성산면 대명리 향림(群山市 聖山面 大明里 香林)의 6세 소감공 양생(少監公 陽生)의 재실경내(齋室境內)에 삼상사(三相祠)를 건립하고 시조와 그 아들 두분(정선공禎, 문헌공華)과 함께 3위의 신위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18일에 전체 후손들이 모여서 제향을 지내고 있는바 근년에는 부부동반한 참사후손이 천여명에 이르고 있다.

 

★ 파조(派祖)

★ 2세 정(楨)은 고려조의 문신으로 시조 경평공의 큰 아들이다. 음보(蔭補=조상의 덕으로 벼슬에 오름)로 누진(累進)하여 원종원년(元宗, 元年)1260 경신에 우부승선 동 4년(1263) 계해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어사대부(御史大夫) 동 6년(1265) 을축에 상서도성 좌복야(尙書都省 左僕射), 동 10년(1269) 기사에 원종이 몽고에 행차 할때 호종(扈從=수행원)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오르고 동11년 (1220) 경오 강도(江都=강화도)의 유수 재임중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자 도망쳐 나와 조정에 보고하매 원종이 사전 대처에 대한 공로를 치하하고 난을 평정후 금자광록 대부 삼사 태보 중서시랑 평장사 평강군(金紫光祿 大夫 三師太保 中書侍郞平章事 平康君)에 이르렀고 동 12년(1271) 신미 8월 병진일에 졸하다. 시호는 정선(靖宣)이고 원종의 묘정에 배향(廟庭配享=공로 있는 신하가 죽었을때 종묘제사에 부제(祔祭)하는 일)하다. 묘는 선영계하이고 군산 삼상사에 신위배향 중이다.

※ 고려사 열전 권 15~102 참조

 

◎ 2세 화(華)는 고려조의 문신으로 시조 경평공의 둘째 아들이다. 음보로 벼슬길에 올라 원종조 중서시랑( 中書侍郞)으로 시작하여 금자광록 대부 문하시랑 평장사, 상장군, 판이부사(金紫光祿 大夫 門下侍郞 平章事, 上將軍, 判吏部事)를 역임하고 졸하다. 시호는 문헌(文獻)이고 묘는 선산계하이며 군산 삼상사에 신위 배향 중이다.

 

◎ 3세 인규(仁揆)도 고려조의 문신으로 2세 정의 큰 아들이다. 원종 11년(1270) 경오에 우승선(右承宣)을 시작으로 충렬왕 15년(1289) 기축에 동지밀직사사 삼중대광첨의중찬(同知密直司事, 三重大匡 僉議中贊)을 역임하고 동왕 29년(1303) 계묘에 치사(致仕)후 졸하다. 시호는 양정(良靖)이다.

 

◎ 3세 인평(仁平)은 2세 정의 둘째 아들이다. 고려 충렬왕 6년 1280 경진 12월에 삼사사(三司使)를 시작으로 밀직사 판도사 판사(密直司, 版圖司 判事)를 거쳐 동 10년(1284) 갑신 6월 정해일에 졸하다.

 

◎ 3세 모(謨)는 2세 화의 큰아들로서 고려 고종 16년(1229) 출생하여 원종 5년(1264)에 원종을 호종한 공으로 합문지후(閤門祗侯) 좌승지, 지신사(左承旨 知申事)를 거쳐 삼별초의 난 때 호남에 출정하여 진압한 공으로 광록어사 대부(光祿御史大夫)에 오르고 그후 원종 11년(1270) 국왕과 세자를 호종한 공으로 광정대부, 도첨의 참리전법전리 판삼사사 상장군(匡靖大夫 都僉議 參理典法典理 判三司事 上將軍)을 거쳐 첨의시랑 찬성사 판군부사사 중서시랑 평장사(僉議侍郞 贊成事 判軍簿司事 中書侍郞 平章事)를 역임하고 충렬왕 28년(1302) 임인 8월 삭(朔) 임술일에 졸하였는바 향년 74세다. 시호는 관신(寬愼)이다.

 

◎ 3세 함(諴)은 2세 화의 둘째 아들로서 고려 원종조에서 좌우위 보승랑장(左右衛 保勝郞將)을 거쳐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 平章事)를 역임하였다.

 

◎ 4세 우(禑)는 고려조의 정승으로 3세 인규의 아들이다 1288(충렬왕 14)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1299(충렬왕 25) 감찰사(監察使)로서 좌창(左倉)의 미곡(米穀)을 궁인에게 주라는 왕명을 부당하다고 거역하여 섬에 유배되었다.

1310(충선왕 2)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1311년 밀직사(密直使)를 역임. 1312년 삼사사(三司使)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 4세 귀수(龜壽)는 3세 인평(仁平)의 다섯째 아들로서 고려 충렬왕조 증삼중대광 문하찬성사 판예의사사 상호군 행 봉순대부 검교감문위 상호군(贈三重大匡 門下贊成事 判禮儀司事 上護軍 行 奉順大夫 檢校監門衛 上護軍)을 역임하였다.

 

◎ 4세 종린(宗璘)은 3세 모(謨)의 큰아들로서 고려 충렬왕 32년(1306)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역임하였다.

 

◎ 4세 종서(宗瑞)는 3세 모(謨)의 둘째아들로서 고려 충렬왕조에서 광주목사(廣州牧使), 첨의정당문학(僉議政堂文學) 밀직사 판도사 판사 상호군(密直司 版圖司 判事 上護軍)을 역임하였다. 1978년 전북 부안(扶安)에 삼현사(三顯祠)를 건립하고 자 문필(文弼)과 손 수(琇) 3위를 배향(配享)하고 매년 제향을 지내고 있다.

 

★ 4세 홍철(洪哲)은 3세 함()의 독자로서 고려24대 원종 3년(1262)에 출생하여 28대 충혜왕 복위 원년(1340)에 79세로 졸하였다. 충렬왕때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응선부녹사, 통례문지후(膺善府錄事, 通禮門祗侯)를 거쳐 장흥부사(長興府使)로 있다가 사임하고 은거 14년간 불교의 철리와 음악을 연구하였다.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특별 초청하여 사의부정(司醫副正)이 되고 1311년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전직지후(前職祗侯)를 연유로 여덟 번 승진하여 정승지위에 올랐으며 1313년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도 다녀왔다.

1314년의 충숙왕 원년에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지적경계(地籍境界), 전적(田籍), 세제(稅制)를 제정할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5도순방계정사(五道巡訪計定使)가 되었고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승진하여 삼사사(三司使)를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320년 충숙왕 7년에 중대광 평강군(重大匡 平康君)에 봉작되고 1332년 충숙왕 복위1년에 찬성사가 되었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순천군(順天君)에 개봉(改封)되고 순성보익찬화공신(純誠輔翊贊化功臣)이 되었다. 문장과 기예(技藝)에 뛰어났고 불교경전(佛敎經典)에 밝았으며 국노(國老)8인을 맞아 기영회(耆英會)를 조직하고 자하동신곡(紫霞洞新曲)을 창작하였는바 현재도 고려악부(高麗樂府)에 전하여 온다.

호는 중암(中菴)이고 군호는 순천군(順天君)이다.

묘는 순천시 덕흥동이다.

※ 고려사열전 권 21~108 참조

 

◎ 5세 승의(承禧)는 4세 귀수의 독자로서 고려말 추충익 대좌명공신 삼중대광 삼사사 겸 판전의사 상호군(推忠翊 戴佐命功臣 三重大匡 三司使 兼 判典議事 上護軍)을 역임하였다.

 

★ 5세 문귀(文貴)는 4세 종린의 둘째 아들로서 고려말기 돈녕부감판서(敦寧府監 判書)를 역임하였다.

 

◎ 5세 문소(文紹)는 4세 종린의 셋째아들로서 고려말기 전법사판서(典法司判書)를 역임하였다.

 

★ 5세 문빈(文彬)은 4세 종린의 네째 아들로서 조선조 태종(朝鮮朝 太宗)때 돈녕부감 재임중 점마어사(敦寧府監 點馬御使)가 되어 함흥 도련포(咸興 都連浦)로 말을 구하러 갔다가 구하지 못하자 장계(狀啓=임금에게 서면 보고)로 이 사실을 고한바 태종이 크게 노하여 그곳 함흥에서 귀양살이 하라는 왕명이 내려 그곳에서 귀양살이 하면서 후손이 연면하여 함흥보청(咸興甫靑)에 세거하고 있다.

 

◎ 5세 문필(文弼)은 4세 종서의 장자로 고려 충선왕때 전리판서 집현전 대제학(典理判書 集賢殿 大提學)을 역임하였다.

 

★ 5세 문무(文懋)는 4세 종서의 둘째아들로서 고려 충선왕때 은광청록대부 상서도성 좌복야 중서시랑 평장사 고성군(銀光靑祿大夫 尙書都省 左僕射 中書侍郞平章事 固城君)에 봉작되었다.

 

◎ 5세 하중(河中)은 4세 홍철의 큰아들로서 고려 27대 충숙왕, 28대 충혜왕, 29대 충목왕, 3대에 걸쳐 계속 정승에 재임하였는바 충혜왕조에서는 벽상1등공신(壁上一等功臣)에 녹훈되고 공민왕때 우정승 영도첨의사사 판삼사사 평강부원군(右政丞 領都 僉議司事 判三司事 平康府院君)에 봉작되다. 두 동생(하생, 하로)이 모두 장상(將相)에 올랐고 친몽고 정치가 (親蒙古政治家)로 기록되고 있다.(부원군=정1품 공신에게 주던 작호)

※ 고려사 열전 38~125  세가 38, 39 공민왕 6년 편 참조

 

◎ 5세 하생(河生)은 4세 홍철의 둘째아들로서 고려 공민왕때 중서시랑 평장사 판종부시사(中書侍郞 平章事 判宗簿寺事)를 역임하였다.

 

◎ 5세하로(河老)는 4세 홍철의 셋째아들로서 고려 공민왕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 6세 연(淵)은 5세 승희의 독자로서 고려말 판첨의부사(判僉議府事)를 역임하였다.

 

★ 6세 양생(陽生)은 5세 문소의 독자로서 고려 공양왕조 군기감소감(軍器監少監)으로 재임중 고려가 망하자 당시 수도 개성을 떠나 예성강(禮成江)변에서 배를 타고 정처없이 수십일을 남하하여 어느 포구에 내렸느바 그곳이 군산(群山)포구였고 그곳에서 가장 험준한 곳을 찾아 임피(臨陂)상북면(上北面) 향림불사(香林佛舍)에 은둔(隱遁=세상을 피하여 숨다)하였는바 그곳이 오늘의 군산시 성산면 대명리 향림으로 현재의 삼상사(三相祠)경내다.

고려의 충신이었고 자손이 번창하여 조선조에서도 평강채씨를 선양하는 명상, 명신, 명장이 거의 이 자손이다.

 

◎ 6세 수(琇) 5세 문필의 독자로서 고려말 좌우위 보승 중랑장(左右衛 保勝 中郞將)을 역임하였는바 고려가 망한 후 고도개성(故都開城)을 지나다가 맥수가(麥穗歌)를 지어 망국의 한을 읊었는바 그 시(詩)가 현재까지 세전(世傳)하고 있다.

 

◎ 6세 상(相)은 5세 문무의 독자로서 고려말 문림랑 사재동정(文林郞 司宰同正)을 역임하였다.

 

◎ 6세 왕진(王)은 5세 하중의 큰아들로서 고려말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역임하였다.

 

◎ 6세 인검(仁儉)은 5세 하생의 독자로서 조선조초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 6세 우상(遇祥)은 5세 하로의 독자로서 조선조초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 7세 왕택(王澤)은 6세 양생의 독자로서 고려 공양왕때 신호위 보승호군 상장군(神虎衛 保勝護軍 上將軍)

※(족보에는 중분시위사 영호군 中賁侍衛司 領護軍으로 기로되고 있음) 정3품관에 재임중.

고려가 망하자 충절을 지키기위하여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두문동으로 들어가 끝까지 항거하다가 이태조(이성계)에게 몰살 당하여 순국한 두문동 72현(杜門洞 72賢)의 한분이다. 두문동으로 들어갈때 산마루고개(현재의 불조현=不朝峴)에 조복(관복)을 벗어 걸어놓고 헌옷과 헌갓으로 갈아입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조 정조(正祖)때 왕명으로 표절사를 세워 배향(配享)하게 하고 후세에 위국순절(爲國殉節)의 귀감(龜鑑)으로 삼았다.

※ 별첨 현인록 참조

 

★ 7세 충경(忠敬)은 6세 수(琇)의 큰아들로서 조선조 초기에 자헌대부 예조판서(資憲大夫 禮曹判書)를 역임하고 치사(致仕)후 요산요수(樂山樂水)를 벗삼아 부안상경치(扶安上京峙)아래 (지금의 상소산=上蘇山)에 은거하였다.

태종14년 보안현, 부령현(保安縣, 扶寧縣)통합당시 관청에서 천묘(千畝=1묘는 30평)의 둔전(屯田=관아에 딸린 땅)과 공의 기지(基地=살고 있는 터전)와 교환 제의가 있었으나 많은 전지(田地)가 불필요하다. 괴지(槐池=느티나무와 연못)만으로 족하다 하고 기지에 정자를 짓고 괴정(槐亭)이라 이름하고 자신의 호(號)도 괴정으로하여 여생을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다.

 

★ 7세 지생(智生)은 6세수(琇)의 넷째아들로서 조선조 태종때 나주 목사(羅州 牧使)를 지냈고 세조 원년(世祖元年)에 수충위사 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 同德功臣)에 녹훈(綠勳)되었다.

 

★ 7세 충정(忠正)은 6세 수(琇)의 다섯째 아들로서 조선조 초기 성균관 생원(成均館 生員)으로 생애를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다.

 

◎ 11세 침()은 10세 정평부사(定平府使) 석경(碩卿)의 독자로서 호는 서강(西岡)이다. 중종 5년(1510)에 16세로 진사과 급제하고 동11년(1516)에 식년문과(式年文科)급제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재임중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다. 이어서 호당(湖堂)에 선임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광을 누리고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사헌부의 수장), 오위도 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 都摠管)을 역임하였다.(정선공파)

평강 문중에서 호당(문관의 영예)선임의 효시(嚆矢)이고 그후 15세 문혜공 호주 채유후(文惠公 湖洲 蔡裕後), 17세 희암 채팽윤(希菴 蔡彭胤) 3인이 그 영광을 누렸다. 별첨 호당록(湖堂錄)참조

 

◎ 11세 세걸(世傑)은 자는 정지(挺之). 중종(中宗)때 문과 급제하여 관찰사(觀察使)를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소감. 첨정)

 

◎ 11세 세영(世英)은 10세 돈녕부첨정(敦寧府僉正) 자연(子涓)의 셋째 아들로서 호는 임징당(任眞堂)이고 별호는 탈필공(奪筆公)이다.(소감공, 첨정)

중종5년(1510)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동12년(1517)탁별시문과(擢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춘추관기사관(春秋館 記事官)으로 재임중이었다.

중종 14년(1519)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등 구폐개혁을 주장하든 신진 사림(士林)이 무고하게 화를 당하게 되자 이에 분개하고 하급관원이면서도 어전회의(御前會議=국왕을 모신 중신회의)에 당당히 나아가 영상 정광필, 우상 안당, 예판 남곤 등에게 이 사건의 원인을 캐어 물었으나 묵묵부답함으로 가승지(假承旨=임시로 임용한 승지)로부터 사필(史筆=사관이 정당하게 회의사실을 기록하는 붓)을 빼앗아 들고 국왕 앞에 나아가 소신은 간관(諫官=사헌부 또는 사간원의 언관)이 아니므로 소임외의 일을 아뢰는 것은 벌을 받아 마땅하나 “이 사림들이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논죄(論罪)하는지 그 죄명을 알고자 하나이다”하고 아뢰니 좌우에 시립한 고관들이 모두 목을 움추리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어전회의는 파하였고 그후 세영도 파직 당하였다. 그러나 대궐 안팎에서 그렇게 강직한 말은 진군자(眞君子)가 아니면 감히 말할수없고 채세영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하며 어전에서 사필을 빼앗아 극간(極諫)한 선비라고 칭송하며 이후 탈필공(奪筆公=붓을 빼앗은 관원)이라 하였다.

그후 조정에서 다시 부르면 복직하고 불의를 보면 사임하고를 거듭하면서 명종 원년(1546)에는 천추사(千秋使=중국 황태자 생일을 축하차 파견되는 사신)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중국어에도 국내 제일의 통달이었다)

명종 3년(1548)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여 6조의 각 참판과 장예원판결사, 한성부우윤을, 외관직으로는 경상 경기, 충청도의 관찰사, 개성유수를 두루 거쳤고 자헌대부로 승진하여서는 한성부판윤, 세자좌우빈객, 공조, 호조판서, 의정부좌우참찬, 지경연사를 역임하였다.

재임중 기묘, 을사 사화로 많은 선비들이 화를 당했으나 세영만은 창안백발(蒼顔白髮)로 조정 신하에게 빛났으며 그 누구도 범하지 못했다고 한다.

노후에 중추부의 한직으로 재임까지 무려 9배명(九拜命=아홉번 재 임용됨)의 광영을 누렸고 추영3세(追榮三世)의 영전(榮典)이 내려 증조고 면천군수 효순은 이조참의에, 조고 사헌부감찰담은 이조참판에, 선고 돈녕부첨정 자연은 이조판서에 각각 증직되었다. 학문이 깊었고 천문, 의약, 중국어에도 통달했으며 선조원년(1568)1월 2일 향년 79세로 타계함에 국왕이 부음을 듣고 철조(撤朝=임시휴무)를 명하고 국왕이 친히 조문하였으니 실로 영광된 일로서 사후에도 가문을 빛냈다.

 

◎ 11세 홍국(弘國)은 판서공파조 충경(忠敬)의 현손이고 10세 용양위 부사정 치의(治義)의 둘째 아들로서 호는 야수(野)이고 남당창의 의병장(南塘倡義 義兵將)이다.

※창의=국난에 의병을 일으킴

중종 29년(1534)부안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조국에 충성하라는 부친의 간곡한 교육을 받았다.

선조 25년(1592)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제봉, 김건재(高霽峰, 金健齋)등의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보고 의병을 모아 금산(錦山)싸움터로 달려 갔으나 고제봉이 전멸한것을 듣고 일단 의병을 해산하고 부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어서 세 아들과 집안장정 20인, 종족 33인 향리 일가친척 59인과 더불어 부안 남당(扶安南塘)에서 창의혈맹(倡義血盟)하고 스스로 의병장(당시:의려장)이 되었다. 그때 도원수 권율(都元帥權慄)이 극찬하였고 그 무렵 관군이나 의병진에 군량이 없어 허덕이므로 의병장 홍국이 의주행재소 영남의 곽재우(郭再祐)진영에 군량을 보급하였고 이때 순천지방이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진격하던중 명나라 지원군 장수인 송경략(宋經略)이 왜군과 화의를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하던중 순창 적성강변에서 야영하면서 통분한 시를 지어 읊었으니 그 시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당시 관찰사 이광(李洸)이 전후사실을 장계로 고하니 선조께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정유재란(선조 30년 1597)때에는 임진란때 창의한 동지들과 동맹재편성함에 있어 동조창의자가 더욱 많아졌다.

동년 3월 12일 왜군이 흥덕으로 쳐들어와 출격해보니 영암, 해남의병이 먼저 와서 격전하고 있어 연합하여 혼전하였는바 이곳이 배풍령(排風嶺)이고 이 전투에서 의병장 채홍국 3부자(홍국, 명달, 경달)가 모두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그외 평강 채씨 의병만도 채홍조(弘祖=홍국의 친형), 채우령(禹齡=15世로 현감) 채상(=홍국의 재종으로 성균관 생원), 채상의 손자 덕량, 충량(德良, 忠良), 채삼(蔘=홍국의 재종) 채삼의 아들 대림(大臨)등이 모두 전사하였다.

고종9년(1872) 홍국은 병조판서에 증직하고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들을 동네에 정문을 세워 길이길이 표창함)를 명하였다. 3. 12~3. 23까지 격전한 이곳을 후세에서 호벌치(胡伐峙)라 하고 현재 정유재란호벌치 전적비를 세우고 전북지방기념물로 지정 보존중이다.

이 남당창의 의병중 평강채씨는 33인 인바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홍국, 우령, 홍조, 명달, 경달, 대형, 중달, 상, 대림, 봉, 영달, 덕량, 치원, 구, 대원, 홍업, 홍우, 영달, 영, 삼, 인달, 이달, 곤, 장, 홍무, 침, 인달, 홍서, 홍주, 치정, 이달, 성장, 충량 등이다.

 

◎ 13세 경선(慶先)은 자는 자장(子長). 호는 죽촌(竹村) 선조때 문과 급제하여 보덕(輔德)을 역임.(소감공주부)

 

◎ 13세 겸길(謙吉)은 자는 길원(吉元) 광해조에서 문과 급제하여 문학이 되고 함경도 순안어사(咸鏡道 巡按御史)를 거쳐 필선(弼善). 장령(掌令)을 역임.(소감공절제사)

 

◎ 13세 희연(希淵)은 판서공파조 충경의 6대손으로 생원 원상의 셋째 아들이며 호는 화암(和菴)이다. 임진왜란때 고경명(高敬命)장군과 합류하여 웅치전(熊峙戰)에 참전하여 항상 백마를 타고 종횡무진 용전하여 백마장군으로 불리우고 이 전투에서 백마가 쓸어지자 도보로 격전중 전사하였다. 선조가 그 공적을 가상하고 선무원 종훈에 녹훈하였다.

 

◎ 13세 희징(希澄)은 희연의 동생으로 원상의 다섯째 아들이며 선전관 해주판관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와 부장 고득뢰(高得賚=그의 장인이다)와 같이 무주, 거창, 개녕에서 승전하고 진주성에 입성하여 사수하던중 다음해 1593 왜군의 총공세로 인하여 의병장, 부장, 김천일(金千鎰), 황진(黃進)등과 같이 격전중 모두 전사하였다.

 

◎ 14세 충원(忠元)은 자는 원부(元夫) 호는 오촌. 병추(梧村. 病醜) 인조때 문과 급제하여 경주부윤(慶州府尹) 역임하고 족보창간하다.(소감공주부)

 

◎ 14세 형(衡)은 자는 자정(子正) 선조때 문과 급제하여 응교(應敎)를 거쳐 인조때 승지(承旨) 역임.(정선공파)

 

◎ 15세 우령(禹齡)은 정선공파 정평부사 안경(安敬)의 8대손이고 사옹원참봉 후침(後沈)의 둘째아들로 호는 향일재다. 진사에 급제하여 무안현감, 재녕군수, 이천도호부사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산의 고경명(高敬命)장군 휘하에 들어가 분전하였으나 고장군이 패하여 전사하자 잔병을 인솔하고 부안 남당창의 의병장(채홍국)휘하에 합류하여 혈맹하고 집안장정 25인을 인솔 참전하여 흥덕, 부안, 무장, 고부, 고창 등을 수호하였으며 순천지방의 위급함을 듣고 진격하던중 석보진(石堡鎭)에서 명나라 원군장수 송경략(宋經略)이 왜군과 화의하였음을 듣고 동지들과 통곡하며 회군하던중 순창 적성강변(赤城江邊)에서 야영하면서 분완시(憤詩=분함을 탄식하는 시)를 읊어 탄식했다고 한다. 당시 도원수 권율(都元帥 權慄)장군이 듣고 극진하게 칭찬하였다고 하며 선조30년(1597) 정유재란에 다시 창의하여 채홍국 의병장과 같이 흥덕장등원(長登原)전투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이어서 호벌치(胡伐峙)전투에서 격전중 세궁역진하여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후 선조는 이 사실을 듣고 선무원종훈에 녹훈하고 가선대부 병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하였다.

 

◎ 15세 천송(千松)은 정선공파 정평부사 안경(安敬)의 8대손이고 주부 수구(壽耉)의 독자로서 호는 금송(琴松)이다.

선조 25년(1592)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의(白衣=벼슬이 없는 사람)로 의병을 모집하여 100여명이 되었다. 도원수 권율(權慄)휘하에 들어가 참모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금산 전투에서 용전 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권율 도원수의 장계로 장령(掌令)을 증직받고 선무원종훈에 녹훈되었다. 광주(光州) 권율도원수유적비에는 아장(亞將)중 제4위로 기록되고 있다.

 

◎ 15세 유후(裕後)는 14세 진사 충연(忠衍)의 큰아들로서 호는 호주(湖洲) 시호는 문혜공(諡號 文惠公)이다.(소감공 주부)

광해 7년(1615) 17세에 생원과 급제하고 인조 원년(1623) 문과전시탁1인(文科殿試擢1人)으로 장원급제(壯元及第=문과 전시 갑과 제1등)하여 호당에 선임되어 사가독서의 영광을 누리고 경관직, 외관직(京官職, 外官職)을 두루 거쳤다. 병자호란(인조 14=1636)때에는 국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파천(播遷)하고 청(淸)과의 화친을 극력반대 하였으며 세자(봉림대군-후에 효종)가 볼모로 심양(瀋陽)에 압송될때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으나 반청관(反淸官=청나라를 배척 반대하는 관원)으로 지목되어 청나라의 압력으로 강계(江界)에서 귀양살이도 하였다.

인조19년(1641) 광해군이 제주에서 죽자 예조참의가 되어 제주에 가서 호상을 맡아보기도 하였다.

세자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효종으로 즉위하자 당상관이 되어 인조실록 효종실록을 편찬하고 대제학(문관 최고의 영예직)이 된 후에는 광해군때 역신들이 잘못 기록한 선조, 인조 신록을 보정 수찬한바 있다.

그후 6조의 참판,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승정원 도승지, 한성부 좌, 우윤을 거쳐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의정부우참찬, 세자좌빈객, 경연, 춘추관, 성균관, 중추부 돈녕부, 의금부의 지사와 오위도 총부 도총관, 내의원 봉상시의 제거등 정2품관 요직을 모두 겸직하였다.

현종원년(1660) 향년 62세로 타계하였는바 인조 22년 심기원(沈奇元)의 역모사건을 처리한 공적으로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녹훈되고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증직되었으며 문혜공(文惠公)으로 증시(贈諡)되었다. 또한 선조, 인조, 효종 3세의 금궤지문(金櫃之文)으로 파격적인 추영(追榮)이 내려 고조 용양위호군 중경은 예조참판겸 양관제학에, 증조 사헌부 집의 난종은 예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에, 조고 홍문관응교 경선은 이조참판에, 선고 진사 충연은 이조판서에 각각 증직되었다.  별첨 문형록, 호당록 참조

 

◎ 15세 진형(震亨)은 14세 정간의 아들로서 조선조의 학자로 유명하다.(소감공 주부)

광해 8년(1616)추에 별시가 있어 제우의 강권으로 응과는 하였으나 책문 대지(策文 大旨) 과제(科題)가 「천인(天人)」이라 하였기에 공은 허두에 「오호(鳴呼)라 당금지사(當今之事)를 상인언재(尙忍言哉)아 천리멸의(天理滅矣)요 인도절의(人道絶矣)라」 갈파(喝破)하고 퇴장하였는데 그 화가 장차 공에게 파급될 것을 우려한 상시관 연원군 이광정(李光廷)이 극력으로 주선하여 대화를 면하였다.

광해군 14년(1622)에 호남인 나만기(羅萬紀)가 인목대비를 모해 하고저 팔도에 통문을 돌리니 그 내용이 흉장역도가 무소취비라 공이 이를 보고 즉석에서 이 통문을 파기 하였다. 그 화가 공에게 미치게 될즈음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화를 면하기도 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으로 인조께서 공주로 파천하시니 왕(王)의 내수에 쓰시도록 양곡을 바치기도 하였다. 평난후 인조께서 환도하실때 전의까지 호가하고 공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교육과 영농에 힘쓰겠다는 뜻을 주청하고 진천으로 귀향하시니 인조께서는 장차 공을 중용하고저 하시던 차라 섭섭한 마음으로 환궁하였다.

진천 몽촌은 공께서 현몽득지한 택지였으며 마을에 上下양소를 축조하고 순채(蓴菜)를 이식한 연유로 순당(蓴塘)이라 자호(自號)까지 하셨으며 「상하쌍순소(上下雙蓴沼), 중간(中間) 일초려(一草廬)」라 음영하였다. 1785년 봄에 그의 입향지(入鄕地)인 지천(鎭川)에 순당(蓴塘) 채선생(蔡先生)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 16세 성구(聖龜)는 15세 진형의 아들로서 선조 38년(1605) 생으로 인조 8년(1630)에 26세의 약관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영월군수(寧越郡守),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소감공 주부)

인조 14년(1636) 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斥和)할 것을 선두에서 주장하였고 이듬해 정축년(丁丑年)에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서구 삼학사(西拘 三學士)가 청국(淸國)으로 볼모로 끌려가자 공은 의불독생(義不獨生)이라 하고 다시 상소(上疏)를 올려 강화(講和)를 극력 배척하는 내용이 너무 격렬하여 임금이 이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비답(批答)하시기를 이글이 문구(文句)마다 충절(忠節)이 넘쳐 흐르나 청인(淸人)들이 알고 트집할까 두려우니 조보(朝報)에는 게재하지 않도록 특히 유념하라 하였다.

인조 23년(1645) 12월 10일에 졸(卒)하였으니 41세의 젊은 나이다.

순조 16년(1816)에 부제학(副提學)으로 추증(追贈)되었으며 다시 고종 8년(1871)에 충절(忠節)이 탁월(卓越)하므로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經筵 義禁府事 弘文館 大提學 藝文館 大提學), 지 춘추관(知 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 都摠管)으로 재추증(再追贈)되고 시호(諡號)는 충헌공(忠憲公)이다.

 

◎ 17세 이장(以章)은 16세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 시흠(時欽)의 독자로서 숙종2년(1676)에 무과에 급제하고 전라좌수사, 경상좌병사, 금위천총, 당상선전관 중화, 영흥, 강계, 김해부사, 경상우병사 등을 역임하였다.(소감공 주부)

재임중 숙종비 민비(인현왕후)의 폐비가 부당(장희빈의 무고)함을 극간하다가 2차에 걸친 5년간의 귀양살이를 하였다. 민비가 복위되고 정국이 안정되어 내외 관직을 재임중에는 청렴관장(淸廉官長)으로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사후 영조조때 그의 손자 정하(挺夏)가 무과에 급제 등용되매 옛일을 회상하고 병조판서에 증직하고 고종조(1879)에서는 충정공(忠貞公)이라 시호가 내렸다.

 

◎ 17세 명윤(明胤)은 자는 중선(仲宣) 호는 오시재(五視齋) 숙종때 문과 급제하고 교리(敎理) 역임.(소감공주부)

 

◎ 17세 성윤(成胤)은 자는 중미(仲美) 호는 구봉(九峰) 숙종때 문과 급제하고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역임.(소감공주부)

 

◎ 17세 팽윤(彭胤)은 16세 동지중추부사 시상(時祥)의 넷째아들로서 호는 희암(希菴)이다. (소감공주부)

숙종13년(1687)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동15년(1689)에 증광시문과 갑과 제3인(增廣試 文科 甲科 第3人=3等)으로 백형, 명륜은 병과로 두 형제가 동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재임중 호당에 선임되어 사가독서의 영광을 누렸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예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외관직으로 서천, 남포(보령), 양양, 무주 현감을 역임하였으며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병조참판, 예조참판, 예문관 제학을 역임하였다.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밀풍군을 추대하며 반역 변란)때는 중형인 한성부좌윤 채성윤과 함께 적진을 거쳐 국왕께 달려가 안위를 물으니 영조가 흐뭇하여 여러차례 포상하기도 하였다. 공은 만 1세때 글자를 판독하였고 4세이후에는 놀라운 신동이 되어 이를 보고파 찾아오는 사람이 문전성시를 이륐다고 하며 글씨와 문장에 당대를 주름잡아 해남의 두륜산 대화사 중창비(頭輪山 大花寺 重創碑)와 대흥사 사적비(大興寺 寺蹟碑)와 양산통도사 세존비와 지리산 화엄사의 상량문등 비문을 짓고 썼다고 한다. 영조 7년(1731)4. 26 졸하다.

☆ 별표 호당록 참조

 

◎ 18세 응복(膺福)은 자는 석오(錫五) 숙종때 문과 급제하여 집의(執義)를 역임.(소감공주부)

 

◎ 18세 응지(膺智)는 제주도(그때는 탐라) 입향조이다(소감, 주부).

당시 입향사연은 기록이 없어 알수 없으나 어떤 사연으로 제주에 갔다가 땅이 기름지고 바다와 산이 아름다울뿐 아니라 기온이 따뜻하여 그곳에 정착하고 자손이 이어져 세거하였다.

사후의 묘소는 의외로 1979년 경기도 과천의 8대조 주부공 자침(子沈) 선영 경내에서 발견되어 후손이 제주로 면봉하였다. 입향사유를 알 길 없는 후손들의 유한(遺恨)이 이어지고 있으나 아마도 광해조 1609-1622연대의 난세에서 이어지는 인조조의 이괄(李适)의 난(1624), 정묘호란(丁卯胡亂)(1627), 병자호란((1636)등 연속적인 국난에 멀리 피난길에 오르지 아니했나 추정될 뿐이다.

아들은 언공(言恭)이고 손자는 덕원(德遠)인바 통정대부다.

후손은 제주에 세거중이고 현재 서울 등 전국 각지에 다수 분포하고 있다.

 

◎ 19세 제공(濟恭)은 18세 지중추부사 응일(膺一)의 독자로서 호는 번암(樊岩)이고 시호는 문숙공(文肅公)이다. (소감공 주부)

조선왕조 500년중 영, 정(英祖, 正祖)시대를 문예부흥기, 실학전성기, 탕평시대라고 하는데 그 이면에는 번암정승의 탁월한 정치역량과 탕평이념의 구현에 수반한 피나는 숨은 공이 있었기에 초당적 문인정치를 꽃피웠을 것이다.

정조라는 불세출의 성왕(聖王)이 재위하면서 그 자신이 탁월한 문장가요 화가였기에 일찍부터 천재를 알아 보았다. 그 밑에 제공이 있었기에 10여년간 독상으로 재임하면서 조선조 3대 명재상(황희, 상진, 채제공)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현재까지도 국영, 민영 방송국(특히교육방송국)에서 그 높은 치적을 재조명하고 있다.

영조10년(1734) 15세때 향시(생원, 진사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아가 동19년(1743)24세때 탁별시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호서(충청)암행어사, 도승지, 양사의 수장, 경기, 함경, 평안도 관찰사 6조의 각 판서를 모두 거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영조34년(1758)에는 도승지가 되어 열성지장(列聖誌狀)을 증보편찬 하였고 역신들에 의한 폐세자의 명이 내린것을 제공이 한사극간하여 이를 막아냈다.

영조 38년(1762)모친상으로 거상중(居喪中)인때 사도세자의 비보를 듣고 상복을 입은채 입궁하여 10여일동안 통곡하였으며 만일 이때 제공이 도승지나 정승에 재직중이었다면 이런 당쟁의 제물이 되는 참사는 없었을 것이라는게 당시의 야사(野史)이기도 하다.

영조 52년(1776)에는 서응명과 같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고 이해 영조가 승하(사망)하자 국장도감(國葬都監)으로 국장을 치루었다.

정조원년(1777)에는 정조가 등극(登極)하자 역신 홍계희, 김상로 등이 국왕을 시해코자 심야 입궁하는 역변이 발생하자 제공이 수궁대장(守宮大將)에 임용되었다.(이판, 형판, 예판, 병판 겸직중에) 정조 12년(1788) 우의정으로 승진할때에는 6대 정책을 진언해서 그대로 시행하였다.

정조 14년(1790)부터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고 제공은 천주교 신봉의 묵인을 주장하다가 반대정파의 모략으로 정조 16년(1792) 좌의정을 일시 사임하고 한직인 판중추부사로 전임하였다.

다음해 정조17년(1393) 영의정에 승진 임명되다. 정조23년(1799)1월 18일 향년 80세로 임종하자 정조대왕의 친제문(親祭文)으로 대신들이 장례를 치루게 하고 비석은 물론이고 생전의 공적을 찬양한 행장뢰문을 지어서 또 친필로써서 비석에 새겨(뢰문비=추모비에 해당)장례시에 세워줬으니 이것도 유사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임종 소식을 들은 서울 관민 수천명이 상가에 몰려와 상중 3개월간 연일 호곡하였고 3월 26일 출상일에는 영남의 10여서원 유생(학자, 선비)들이 장지에서 회의를 열고 사림장(士林葬)으로 장사를 지냈으니 이것도 조선조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묘    소:경기도 용인시 역북동 산 3, 4, 5 경기도 기념물 제17호

   뢰문비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6호

   배향사당

   상의사(尙義祠) 충남, 청양, 화성, 구재 충남 유형문화재 제130호

   미천서원(眉泉書院) 전남, 나주        전남 지방문화재 제29호

   도강영당(道江影堂) 충남, 부여       충남 문화재자료 제116호

   추영 4세의 은전이 내려 아래와 같이 증직되다

   고조고 화순현감 진후(振後)는 이조참판에

   증조고 동지중추부사 시상(時祥)은 이조판서에

   조고 한성부좌윤 성윤(成胤)은 의정부 좌찬성, 양관대제학에

   선고 지중추부사 응일(膺一)은 의정부 영의정에

 

<일화(逸話)>

1. 14세 어린날의 채제공

눈 내린 깊은 산속의 호랑이(현재 대학 국어에서 교육 중)

 

단풍도 끝물이라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냈다. 절간의 풍경 소리도 차갑게 느껴지는 늦가을이었다.

골짜기를 감싸고 흐르는 계곡수(溪谷水)는 단풍잎을 점점이 띄운 채 흘렀다. 그 광경(光景)을 굽어 보는 높드리에 마당처럼 널찍한 바위가 있었고, 바위에는 열명 남짓한 젊은 선비들이 조촐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지난 봄, 이 산(山)에 들어와 한솥밥을 먹은 우리가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부지런히 공부들 하였으니, 각자 시(詩)를 한 수(首)씩 지어 나누어 가지도록 합시다.”

흥이 무르익자 판서(判書)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말했다.

“좋소이다. 바람 불 적마다 겨울을 재촉하는 나뭇잎이 애달프게 지는데, 어찌 이별의 시(詩) 한 수(首)가 없겠소.”

“오늘 시(詩)를 보며 장차 누가 장원(壯元)을 할지 점쳐 보는 것도 재미있겠구료.”

모두들 좋다고 맞장구를 쳤다.

열다섯에서 스물 살 남짓한 그들은 대개 권세(權勢)있는 양반(兩班)집 도령이었다. 누구는 재상(宰相)의 아들이고, 누구는 판서(判書)의 아들이며, 모두 권문세족(權門勢族) 출신이었다. 그런 가운데 행색(行色)이 초라한 홍안(紅顔)의 소년(少年)도 끼어 앉아 흡사 개밥에 도토리마냥 무시당하고 있었다.

심산(深山) 계곡의 너럭바위가 과장(科場)이라도 되는 듯 모두들 하얀 종이 위에 먹물을 찍어 써나갔다. 그런 다음 차례로 시(詩)를 읽고는 촌평(寸評)과 더불어 덕담(德談)을 나누었다. 시평회(詩評會)가 끝나고 다시 잔에 술이 채워질 때였다.

“왜 내 시(詩)는 돌려보지 않는 겁니까?”

오랫동안 구석진 곳에 앉아 있던 소년(少年)이 말했다. 그는 무리 가운데 가장 어려 솜털이 보송보송하였다.

“아하, 그대가 있는 줄을 미처 몰랐네 그려. 하도 조용해서 없는 줄로 알았지 뭔가. 자네가 직접 소리내어 읊어 보게. 하하하.”

판서(判書)의 아들이 웃자 모두들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소년(少年)은 늘 도령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다. 가세(家勢)가 어려워져 있어 절을 찾아도 시줏돈 조차 제대로 못 냈던 것이다. 하지만 소년(少年)은 당당히 자신의 시지(詩紙)를 들고 낭송(朗誦)하였다.

 

한상고백 응생자, 설월공림 호양정.

寒霜古柏 鷹生子, 雪月空林 虎養精.

 

찬서리 내린 잣나무 고목(古木)에 매가 새끼를 낳고

눈 쌓인 달밤 깊은 숲속에 호랑이가 정기(精氣)를 기르다.

 

모두들 작의(作意)를 간파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러는 시지(詩紙)를 받아 찬찬히 뜯어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한 도령이 입을 열었다.

“매와 호랑이의 기상(氣像)을 본받으려는 건 좋지만, 너무 허황(虛荒)되지 않은가. 참새는 매가 될 수 없고, 강아지가 범이 될 리도 없으니 말일세.”(무식한 해석)

소년(少年)의 기울어진 집안형편과 초라한 행색(行色)을 비아냥거리는 말에 골짜기는 웃음 바다가 되었다. 하지만 소년(少年)은 당황하거나 노(怒)하지도 않고 일어서서 공손히 절을 하고는 수북하게 쌓인 낙엽(落葉)을 밟으며 총총히 물러났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재상(宰相)의 아들이 소년(少年)의 시(詩)를 다시 보고는 챙겨 넣었다.

“아버님, 이 시(詩)를 좀 보아주십시오. 뭔가 깊은 뜻이 있는 듯한데,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귀가(歸家)한 재상(宰相)의 아들이 부친에게 소년(少年)의 시(詩)를 펼쳐 보였다. 심드렁하게 시지(詩紙)를 받아 들었던 재상(宰相)의 눈에 어느 순간 반짝 빛이 감돌았다.

“이게 누구의 시(詩)더냐?”

“이번에 같이 산사(山寺)에서 공부한 소년이 송별연(送別宴)에서 지은 것입니다.”

“틀림없이 여러 사람이 그 소년(少年)을 놀려대며 업신여겼겠구나.”

“예. 아직 어리기도 하고, 집안이 하도 가난해서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리석은 것들.”

재상(宰相)은 혀를 끌끌 차고는 그 시(詩)를 풀이해 주었다.

“매는 가을에 새끼를 치지 않는다. 가을에 태어났다면 추운데다 제대로 먹지도 못해 용맹(勇猛)스런 매가 되지 못할 테니까. 이는 곧 그 소년(少年)이 자신을 놀려대는 너희들이 볼품없는 무리라고 조롱(嘲弄)한 것이다.”

“다음 구절(句節)은 무슨 뜻입니까?”

아들이 놀라워하며 물었다.

“생각해 보아라. 눈으로 덮인 산(山)에서 호랑이가 홀로 달빛을 받으며 기개(氣槪)를 기르는 모습을! 이는 어떤 어려움에도 굽히지 않는 대장부(大丈夫)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말하는 것으로, 곧 자기 자신을 나타냄이다. 그 아이 이름이 무엇이더냐?”

“忠淸道 洪州(충청도 홍주) 사람인데, 관심을 두지 않아 이름은 잊었습니다.”

재상(宰相)이 무릎을 철썩 치면서 말했다.

“너는 참으로 아까운 벗을 놓쳤구나. 이 아이는 장차 크게 될 인물(人物)임에 분명하거늘, 쯧쯧.”

인물(人物)은 역시 인물(人物)을 알아보는 법인가. 재상(宰相)은 시(詩)만 보고도 가난한 그 소년(少年)이 장차 삼공(三公)의 반열에 오르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 소년(少年)의 이름은 바로 채제공(蔡濟恭)이었다.

 

2. 죽은 후의 채제공

화부화(花復花) “꽃진 열매에 다시 피는 꽃”

 

정조(正祖)는 크게 상심하여 승지(承旨)를 보내 채제공의 장례(葬禮)를 치르게 하였다. 그만큼 두 사람은 학문(學問)과 정치적 동반자로서 사이가 두터웠던 것이다.

『大東紀聞』은 정조(正祖)와 채제공(蔡濟恭) 사이에 얽힌 재미있는 설화(話) 한 편을 전한다.

정조(正祖)는 규강작(奎章閣)선비들에게 종종 시(詩)를 쓰게 하거나 시제(詩題)를 내어 재주를 가늠하기를 즐겼는데, 하루는 아주 기발한 시제(詩題)를 떠올렸다.

화부화(花復花)!

이는 어느 책에도 용사(用辭)가 없는 어휘로 정조(正祖) 자신이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과제(科題)를 내려니 문득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채제공(蔡濟恭)은 알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정조(正祖)는 채제공(蔡濟恭)이 타계(他界)한 얼마 뒤에 과장(科場)을 열어 그 소재를 내걸었다.

결과는 정조(正祖)가 생각한 바와 같았다. 제대로 답을 써낸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정곡(正鵠)을 찌른 답안지(答案紙)가 딱 하나 있었다. 이름 없는 시골 선비가 출제(出題) 의도(意圖)를 정확히 파악하고 합당한 논술(論述)를 편 것이었다. 정조(正祖)는 그 답안(答案)을 장원(壯元)으로 뽑고 선비에게 물었다.

“누가 이 제목의 뜻을 가르쳐 주던가?”

그러자 선비는 상경(上京) 길에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선비가 용인(龍仁)의 어느 산마루를 지날 때였다. 날이 저물어 하루밤 묵을 곳을 찾는데 마침 한 노인(老人)이 나타나 자기 집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 노인(老人)이 넌지시 말했다.

“이번 과거(科擧)의 제목은 화부화(花復花)일 테니 미리 대비하시오.”

선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굳이 풀이하자면, ‘꽃이 진 열매에서 다시 피는 꽃’이라는 뜻이오.”

“처음 듣는 말인데, 대체 어느 책에 나오는 구절(句節)입니까?”

“그 어떤 책에도 나오지 않소. 그러나 어렵게 생각할 것 없소. 우리네 삶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아주 흔한 꽃이니, 바로 목화라오.”

선비는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면서도 그 뜻을 곰곰 헤아리며 입경(入京)하였고, ‘花復花’라는 과제(科題)가 내걸리자 옳다구나 하고 써내려간 것이었다.

“그 노인(老人)의 생김생김이 어떠하던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정조(正祖)가 물었다.

“얼굴이 길고 갸름하고 키는 훌쩍 컸으며, 코도 크고 입술은 두툼하였습니다.”

정조(正祖)는 즉시 사람을 보내 선비가 하룻밤 유숙(留宿)했던 장소를 확인하였다.

“거기에 집은 없고 다만 무덤이 있었는데, 바로 전임(前任) 재상(宰相) 채제공(蔡濟恭)의 비석(碑石)이 있었습니다."

이에 정조(正祖)가 감탄하여 말했다.

“번암(樊巖)이 죽어서도 재주를 부리는구나!”

花復花. 참으로 그럴듯한 제목(題目)입니다. 세종(世宗)~성종(成宗) 시대(時代)에 활짝 피었던 조선(朝鮮)의 문화(文化)가 영조(英祖)~정조(正祖) 시대(時代)에 다시 꽃핀 것이니, 곧 花復花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나 문예부흥(文藝復興)이라는 말보다 얼마나 사실적(寫實的)이고 멋들어진가. 정조(正祖)가 이 말을 만들어 내고 채제공(蔡濟恭)이 홀로 이 뜻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당쟁(黨爭)을 일소(一掃)하고 문화(文化)를 꽃 피우고자 했던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통했음을 입증한다.

 

◎ 19세 위하(緯夏)는 자는 중륜(仲倫) 영조때 문과에 급제하고 정조때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역임.(소감공주부)

 

◎ 19세 정하(廷夏)는 18세 응정(膺禎)의 3자로서 호는 우안재(遇安齋)다. (소감공, 주부)

숙종 46년(1720)에 출생하여 영조 29년(1753)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출사(出仕)하다. 정조 20년(1796)에 지도녕부사(知敦寧府事) 재임중 기로소(耆老所:70세가 넘은 현직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이 모여 놀도록 마련한 국영 경로당으로 이곳에 들어가면 전토(田土)와 노비(奴婢)가 하사(下賜)되고 승문원과 성균관에서 7품이하 관원이 1명씩 차출되어 수직관(守直官)으로 근무함:기사, 기소라고도 함)에 들어갔고 동 24년(1800) 지중추부사, 형조판서겸 호조판서 오위도총부도총관 지돈녕부사를 역임하고 순조3년(1803)에 향년 84세로 졸하다.

사후 추영의 은전으로 조고 봉장(鳳章)은 호조참판에 선고응정(膺禎)은 호조판서에 증직되다.

   ※기로소 입사:세영, 제공, 정하, 홍리(世英, 濟恭, 廷夏, 弘履)

 

◎ 20세 홍원(弘遠)은 자는 이숙(爾淑) 호는 어사산인(於斯散人). (소감공주부), 영의정(領議政) 제공(濟恭)에게 입양(入養), 1792년(정조 1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고, 1796년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올랐다. 이듬해 승지(承旨)가 되었으나 1801년(순조 1)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된 대왕대비(大王大妃 : 정순왕후) 김씨(金氏)의 시파(時派)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파직당하고, 이듬해 온성(穩城)에 유배되었다가 1805년 방환, 후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일찍이 정약용(丁若鏞)·이유수(李儒修)·한치은(韓致應)·윤지눌(尹持訥)·신성모(申星模) 등 여러 학자·문인들과 죽란시사(竹蘭詩社)를 맺어 교유하여 문명이 높았다. 정조(正祖)의 명으로 영남(嶺南) 출신 450여명을수록한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를 편찬하였다.

 

◎ 20세 홍리(弘履)는 19세 의공(義恭)의 독자로서 호는 기천(岐川)이다.

영조 13년(1737)에 출생하여 동 38년(1762) 식년 진사과에 장원급제하고 동 42년(1766)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三司)를 두루 거쳐 사헌부 대사헌, 형조판서(司憲府 大司憲 刑曹判書)를 역임하였다.

형조판서 재임중 기로소(耆老所, 耆社, 耆所)에 들어갔고 치사(致仕)후에 봉조하(奉朝賀=실제 정무는 보지아니하고 국가의식이 있을때 관복을 입고 참여하며 종신토록 녹봉이 지급되는 특별 예우직)의 특전관직을 받았으며 순조 6년(1806) 향년 70세로 졸하다.

사후 추영의 은전으로 조고 응조(膺祖)는 이조참판에 선고 의공(義恭)은 이조판서에 증직되다.

 

◎ 21세 학영(學永)은 고종 11년(1874) 무과급제(武科及第)하여 순조(純祖)조에서 좌포장(左捕將)을 역임하였다.(소감공주부)

 

◎ 22세 동건(東健)은 21세 포도대장(좌포장)학영(學永)의 독자로서 고종26년(1889)무과에 급제하여 내외문무관직을 역임하였는바 조선조 장신록(將臣錄)편의 장수(將帥)220인 중에 단 한사람의 채씨다.(소감공 주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시작으로 개성부안무사(開城府按撫使)와 평안도 병마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경상, 전라, 충청도 수군사령관)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어영청, 금위청, 후련도감)를 거쳐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손자 규상(奎常)도 경상좌우병마절도사를 거쳐 나주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추영3세의 은전으로 증조고 광하는 승정원 좌승지에 조고운산군수 현구는 병조참판에 선고 좌포장 학영은 의정부 좌참찬에 증직되다.

 

◎ 23세 원묵(元默)은 호는 삼가재(三可齋) 순조(純祖)때 문과 급제하여 헌종, 철종(憲宗, 哲宗)조에서 병조참지, 좌부승지, 경연참찬, 춘추관수찬관,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역임.(소감공주부)

 

◎ 23세 광묵(光默)은 14세 충원(忠元=경주부윤으로 평강채씨 족보창간함)의 9대손이고 22세 동식(東軾)의 큰아들인바 호는 귀년(龜淵)이다.(소감공 주부)

고종 32년(1895)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고종비 민 중전)가 시해되자 박창노, 안병찬과 의병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당시 홍주(현 홍성)목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실패하고 상경하여 수차 통분을 상소하였다. 그 기백을 가상하고 내부주사에 임명하였으나 부임을 거절하고 다시 귀향하였다.

1905년 을사 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박창노, 안병찬, 박안기, 이만식 등과 의병을 일으켜 다음해 민종식의 휘하에 합류하여 홍성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격전중에 아들 규대(奎大)와 함께 전사하였다.

대한민국 광복후 건국무공훈장이 추서되고 국가에서 절사(節祠)용 위토를 구입 보존하였다.

현재 충남 청양군 화성지서 광장에 공적비를 세워 추모하고 있다.

 

◎ 24세 규상(奎常)은 호는 문암(汶庵) 철종(哲宗)조에서 무과급제(武科及第)하고 고종조(高宗朝)에서 경상좌우병마절도사(慶尙左右兵馬節度使)를 거쳐 나주관찰사(羅州觀察使) 역임.(소감공주부)

 

◎ 24세 영찬(永贊) 1854(철종 5)~1908(융희 2).

일명 기문(基文). 전북 순창(淳昌) 출신. 포수(砲手)로 있다가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이듬해 최익현(崔益鉉)·임병찬(林炳瓚)의 의병에 가담, 대포장(大砲長)이 되었다.

순창(淳昌)에서 패전하자 임병찬의 명령으로 의병 명부를 가지고 피함으로써 의병 1천여명의 체포를 면하게 했고, 그 후 순창군(淳昌郡)의 창의장(倡義將) 김상기(金相璣) 휘하에 들어가 경남 하동군 화개동(花開洞)에서 광양 의장(光陽義將) 백낙구(白樂九)와 합세, 순천(順天)을 공격하다가 체포되어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다시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하다가 석탄 장수를 가장한 일본군에게 사살되었다.

 

◎ 24세 응언(膺彦)은 평남 자산(慈山) 출신으로 1907년 평원군(平原郡) 숙천(肅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진룡(李鎭龍) 부대에 합류, 부장(副將)이 되어 평안도·함경도 일대에서 활약했다.

1910년 강두칠(康斗弼)과 함께 의병을 인솔, 안변 마전동 주재소(安邊馬轉洞駐在所) 황해도 선암(仙岩) 헌병파견대 등을 습격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후 강원도에 들어가 계속 항일투쟁을 하다가 1915년 평남(平南) 성천(成川)에서 잡혀 사형당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 24세 규봉(奎鳳)은 철종조에서 무과급제(武科及第)하여 부사(府使) 역임.(소감공주부)

 

◎ 24세 규룡(奎龍)은 철종조에서 무과급제(武科及第)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 역임.(소감공주부)

 

◎ 24세 규준(奎駿)은 고종조에서 무과급제(武科及第)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 역임.(소감공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