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채씨(仁川蔡氏)의 관향(貫鄕)은 인천(仁川)인데 인천은 경기도 중서부 경기만에 돌출한 반도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의 매소홀현(買召忽縣)이라 칭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경덕왕 때 소성(邵城)으로 개칭 율진군(지금의 시흥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시대(1018년:현종 9년)에는 수주(樹州:지금 부평)에 속하였으며, 숙종때 경원군, 인종때 인주(仁州), 1390년(공양왕2)에 경원부(慶源府)로 계속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392년(태조원년) 인주(仁州)로 개칭. 1413년(태종13)에 인천군(仁川郡)이 되었으며 1460년(세조6)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949년 인천시(仁川市)로 개칭되었다.

 

인천채씨(仁川蔡氏)의 시조는 채선무(蔡先茂)이며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없어 상고(詳考)할 수 없으며 그는 고려때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추증되고 인천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인천을 관향(貫鄕)으로 하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및 한국지리지(韓國地理誌) 인천조(仁川條)와 인천시지(仁川市誌)에 의하면 고려조 때 인천지방에 채씨(蔡氏) 이씨(李氏) 하씨(河氏) 문씨(門氏) 공씨(貢氏)등 호족(豪族:그 지방에서 세력이 드센 일족)이 세거(世居)하였다고 되어 있어 인천이 인천채씨(仁川蔡氏)의 세거지(世居地) 임을 입증하고 있다.

 

또 조선조 중종(1506~1544)때 이행(李荇)등이 발간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편 인물란(人物欄)에 의하면 『채보문(蔡寶文)은 고려조 의종 때 이순우(李純祐)의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官職)이 병부시랑(兵部侍郞) 지제고(知制誥)를 지냈으며 보문(寶文)은 동지공(同知公:始祖)의 손자인 금성공(錦城公)의 이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동지공(同知公:始祖)과 금성공(錦城公) 조손(祖孫)이 인천지방에서 일문(一門)을 번창시키고 세거(世居)하셨음이 한층 명백해 졌으나 득본시기(得本時期)는 기록이 없다.

 

고려시대 인물(高麗時代 人物)

 

*채선무(蔡先茂 : 始祖)

인천채씨(仁川蔡氏) 시조(始祖)이며 고려조(高麗朝)의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추증(追贈)되었음. 단소(壇所)는 대구 도곡산에 있음.

*채보문(蔡寶文 : 三世)

고려 의종(毅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학문이 탁월했으며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추밀원사(樞密院事) 예부상서(禮部尙書) 태자빈객(太子賓客) 지제고(知制誥)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였고 금성백(錦城伯)에 봉해졌다.

*채귀하(蔡貴河 : 十世)

선조(先祖) 다의당(多義堂)은 인천채씨(仁川蔡氏)의 중시조(中始祖)이시다. 휘(諱)는 귀하(貴河)이시고 자(字)는 청일(淸一) 호(號)는 다의당(多義堂)이시며 인천채씨 시조(始祖) 고려조(高麗朝)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휘(諱) 선무(先茂)의 십세손(十世孫)이시고 고려(高麗)때 문학(文學)이 대명(大鳴)하시어 의종왕(毅宗王) 때 등제(登第)하시어 예부상서(禮部尙書) 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提學) 금성백(錦城伯) 휘(諱) 보문(寶文)의 팔세손(八世孫)이시며 광정대부(匡靖大夫) 형부상서(刑部尙書) 휘(諱) 원길(元吉)의 아드님이다.

 

일찍이 대구(大邱) 후동(後洞:지금의 중구 포정동 중앙공원)에서 출생(出生)하시었다. 어려서부터 천성(天性)이 온후(溫厚)하시고 효성(孝誠)이 지극(至極) 하시었으며 문예(文藝)가 출중(出衆)하였다.

이웃 고을에 거주(居住)하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는 인의(隣誼)가 돈독(敦篤)하여 少年시절부터 교유(交遊)하며 경전(經傳)을 강론(講論)하시고 도의(道義)를 탁마(琢磨)하시며 스스로 위기학(爲己學)에 분발(奮發)하시더니 문학(文學)이 대명(大鳴)하시었다.

 

벼슬길에 올라서는 오랫동안 제학(提學)을 연임(連任)하시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이르다. 고려(高麗)의 운(運)이 다하여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일어나 이성계(李成桂)가 새 임금으로 등극(登極)하니 다의당(多義堂) 선조(先祖)께서는 대성통곡(大聲痛哭)하시고 나라는 파(破)하고 임금은 없어 졌으니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국파군망 아안귀실(國破君亡 我安歸失)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 이씨왕조(李氏王朝)에 조회(朝會)하지 안겠다고  동지(同志)들과 함께 괘관(掛冠:지금의 사직과 같음)하고  부조현(不朝峴)을 넘어 만수산(萬壽山)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시어 새 왕조에 항거(抗拒)하였던 것이다.

 

두문동(杜門洞) 근처(近處)에 왕능(王陵)이 있어 다의당 선조께서는 그 왕능(王陵)을 바라보시며 고려조(高麗朝)때 군신지의(君臣之義)를 잊지 못하시고 밤낮으로 호곡(號哭)하시며 장차 하종(下從:임금을 따라 죽는다는 뜻)을 맹세하시고 오직 충절(忠節)로써 이조(李朝)에 항거(抗拒) 하였다.

그리하여 두문동(杜門洞)에 모인 사람이 모두 칠십이명(七十二名) 이 분들이 유명(有名)한 고려충신(高麗忠臣) 두문동 칠십이현(杜門洞 七十二賢)이다.

 

西紀一三九二年 임신년(壬申年) 가을 다의당(多義堂)선조께서는 同志 전서(典書) 이맹운(李孟芸)과 전서(典書) 김모(성명미상)와 더불어 벽란진(碧瀾津:개성에서 서쪽 십리에 있는 예성강 나루터)을 건너 평산군 목단면(平山郡 牧丹面) 다의현(多義峴)에 둔황(遯荒-거친 땅으로 도피 하는 것) 하시었다.

다의당(多義堂) 선조(先祖)께서는 고대중국(古代中國)에 은(殷)나라가 망(亡)하고 주(周)나라가 새로 들어섰는데 은(殷) 나라의 충신(忠信)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두 형제(兄弟)가 주(周)나라 땅에서 나는 곡식(穀食)도 안 먹겠다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살다가 깨끗하게 생을 마치었다.

 

다의당(多義堂) 선조께서는 그들의 충절(忠節)을 지극히 사모(思慕)하시고 가상(嘉賞)하시어 그의 고사리 캐는 모습을 채미도(採薇圖)로 그려놓고 날마다 그 채미도(採薇圖)를 바라보시고(일관채미도-日觀採薇圖라 고함) 오직 고려(高麗)만을 생각(生覺)하시며 폐문불출(閉門不出)하시다가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고 둔황지(遯荒地)인 다의현(多義峴)에서 生을 마치었다.

 

後世에 이르러 왕조(王朝)는 다르지만 이씨왕조(李氏王朝)에서 우리 다의당 선조 (多義堂 先祖)의 만고의 충절(忠節)을 가상(嘉賞) 이를 계세권면(繼世勸勉) 토록 기리기 위하여 정의공(貞義公)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청백자수왈 정 (淸白自守曰 貞) 견의능충왈 의 (見義能忠曰 義) 또한 평산(平山) 유림(儒林)에서 다의당 선조(多義堂 先祖)의 충절과 고매(高邁)한 덕의(德義)를 사표(師表)로 삼아 목단면(牧丹面)의현리(義峴里)에 다의당(多義堂)의 독향(獨享)으로 의현사(義峴祠)를 창건(創建)하여 매년 三月十五日 과 九月十五日에 그 곳 유림(儒林) 주도(主導)로 제향(祭享)을 봉행(奉行)하였다.

 

또한 대구(大邱)에 서산서원(西山書院) 상주(尙州)의 웅연서원(熊淵書院)에 타령(妥靈-신주를 섬겨 모신다는 뜻)하고 개성(開城)에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장성(長城) 경현사(景賢祠)에 각각 배향(配享)하였다. 여말충의열전 참조(麗末忠義列傳 參照) 그 후 구한말(舊韓末) 대원군(大院君) 집정시(執政時)에 모두 훼손(毁損)되었다. 후에 대원군 하야(下野)후에도 전연 복원(復元)치 못하였으나 평산의 의현사(義峴祠)만은 西紀一九一二年 경에 그곳 유림(儒林)과 후손(後孫)들에 의하여  다의당 선조(多義堂 先祖)의 은둔지(隱遁地)인 다의현에 복원(復元)하고 전과 같이 봉향(奉享)하고 있다.

 

八.一五 해방(解放)후 국토(國土)가 南北으로 양단(兩斷)되고 의현사(義峴祠)가 北에 편재(偏在) 되어 제향(祭享)은 물론(勿論) 사우(祠宇)까지 강제철거(强制撤去)당하였다 부득이 남한(南韓)의 후손(後孫)들이 합심하여 다의당 선조의 出生地인 대구 압로정(押鷺亭)뒤에 부지(敷地)를 구입(購入)하고 적은 규모로 사우(祠宇)를 건축(建築)하고 의현사(義峴祠)라는 현판(懸板)아래 西紀一九八二年에 첫 번째 제향(祭享)을  봉행(奉行)하여던 것이다. 그 후부터는 매년(每年)四月 셋째 일요일(日曜日)에 제향(祭享)을 봉행(奉行)하고 있다.

 

조선시대 인물(朝鮮時代 人物)

 

*채  영(蔡  泳 : 十一世)

조선 때 조봉대부(朝奉大夫) 군자소감(軍資少監)을 지냈다.

*채  부(蔡  浮 : 十一世)

조선 때 세자 익위사(世子 翊衛司) 세마(洗馬)를 역임하였다.

*채명양(蔡明陽 : 十一世)

세조 때 소감세마(少監洗馬) 통정대부(通政大夫) 교동수군절도사(喬桐水軍節度使) 겸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지냈다.

*채  승(蔡  昇 : 十二世)

조선 때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채  륜(蔡  倫 : 十二世.少監)

진사(進士)가 되고 학문이 깊었으며 정언(正言) 봉열대부(奉列大夫)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좌필선(左弼善) 역임.

*채신보(蔡申保 : 十三世.少監)   1420(세종 2)~1489(성종 20)

자(字)는 자휴(子休). 호(號)는 만계(灣溪). 1438년 진사(進士). 함창 경산 현감(縣監). 남양도호부사(南陽都護府使). 진영병마절제사(鎭營兵馬節制使)를 역임.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소성군(邵城君)에 봉해지다.

*채  수(蔡  壽 : 十四世.少監)   1449(세종 31)~1515(중종 10)

자(字)는 기지(耆之). 호(號)는 난재(懶齋). 시호(諡號)는 양정(襄靖).

1468년(세조 13) 생원(生員). 진사(進士). 1469년(예종 1) 추장문과(秋場文科) 관시(館試:初試). 회시(會試:覆試). 전시(殿試)에 각각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조선조(朝鮮朝) 518년 동안에 배출된 삼장원급제(三壯元及第) 두 사람(李石亨) 중의 한 사람이며 호당(湖堂)에 뽑힘. 1469년 부수찬(副修撰)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찬(編纂)에 참여했으며 1470년(성종1)에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75년(성종 6)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서 음악에 조예가 깊어 장악원(掌樂院)의 관직을 겸직(兼職)하였고. 1476년(성종 7)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478년(성종 9)에 응교(應敎)로 도승지(都承旨) 임사홍의 비행을 탄핵하여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했고 1479(성종 10) 정현왕후(윤씨)의 폐위에 반대했다가 파직,  1481(성종 12) 용서되어 직첩(職牒)이 환급(還給)되고 그 후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충청도 관찰사(觀察使)․평양감사(平壤監事)․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대사성(大司成)․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 1506년(중종 원년)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지다. 1511년(중종 6) 국내 최초의 한글소설 설공찬전(薛公璨傳)을 저술(인간의 화복이 윤회한다는 줄거리)하여 궁중 및 전국 반가 부녀자들이 필사(筆寫)하여 탐독하였으며 나라에서 왕명으로 전부 폐기 처분시켰으나 일부가 근간에 발견되다. 1515년(중종 10) 11월 8일(음력) 사망하였으며 좌참찬(左參贊)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는 양정(襄靖)을 제수(除授)받음. 함창 임호서원 문경 응연서원에  배향되고 있음.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로 지정되었다.

*채윤권(蔡胤權 : 十五世.少監)     1472(성종 3)~1503(연산 9)

자(字)는 희종(希宗).  진사(進士) 참봉(參奉)을 지냈다.

*채소권(蔡紹權 : 十五世.少監)   1480(성종 11)~1548(명종 3)

자(字)는 효중(孝仲). 호(號)는 졸재(拙齋).  생원(生員). 진사(進士).

1506(중종 원년) 문과급제(文科及第).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음. 문경 웅연서원(熊淵書院)에 배향(配享)하며 저서 화왕전(花王傳)은 학계에 연구대상이 되어 있음

*채승권(蔡承權 : 十五世.少監)   1485(성종 16)~1542(중종 37)

자(字)는 이술(而述).  1504(연산 10) 향시(鄕試) 삼장(三場) 합격.

1510(중종 5) 성균관 진사(成均館 進士)  속동문선편찬(續東文選編纂) 감동유사(監董有司) 역임

*채윤호(蔡允浩 : 十六世.叅議)

자(字)는 양오(養吾). 호(號)는 반구당(伴鷗堂).  생원(生員) 안동교수(安東敎授). 조선 때 학자(學者)로 후진교육에 힘썼다.

*채무일(蔡無逸 : 十六世.少監)  1496(연산 2)~1558(명종 13)

자(字)는 거경(居敬). 호(號)는 휴암(休巖).

생원(生員) 진사시(進士試)에 장원. 1534년(중종 29)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1537(중종 32)에 풀려났음. 1540(중종 35) 문과급제(文科及第). 헌납(獻納). 어사(御使). 첨정(僉正).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역임. 그림에 뛰어나 중종이 죽었을 때 중종의 초상화를 그렸고. 그림 팔분체(八分體)글씨 음률(音律) 의약(醫藥) 복서(卜筮)등에도 정통했다. 함창 임호서원(臨湖書院)에 배향(配享).

*채무택(蔡無擇 : 十六世.少監)  ( ? )~1537(중종 32)

자(字)는 언성(彦誠).  문과급제(文科及第) 지평(持平) 부교리(副校理) 장령(掌令) 응교(應敎) 등을 거쳐 1535년(중종 30) 대사간(大司諫)에 오르고,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이 되다.  그 후 삭탈관직(削奪官職)

*채무적(蔡無敵 : 十六世.少監)  1500(연산 6)~1554(명종 9)

자(字)는 거인(居仁). 호(號)는 교헌(僑軒). 생원(生員). 현감(縣監).

부사(府使)를 역임하고 1552(명종 7) 음률(音律)에 능하므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율관(律管)을 교정(校正)했다.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함창 율봉사(栗峰祠)에 배향되었음.

*채응린(蔡應隣 : 十七世.少監)  1529(중종 24)~1584(선조 17)

자(字)는 군서(君瑞). 호(號)는 송담(松潭)또는 탄은(灘隱) 가정(嘉靖)

생원(生員)이며 조선때 학자로서 유명하였다. 어진 행실로서 달성십현록에 실려있으며 대구 유호서원에 배향되었다가 서산서원에 이향됨.

*채종길(蔡宗吉 : 十七世.少監)  1567(명종 22)~1624(인조 2)

자(字)는 선여(善汝). 호(號)는 송촌(松村). 학문 품행 지조 절의를 세인이 칭송하다.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현감(縣監)을 역임

*채선견(蔡先見 : 十八世.少監)  1574(선조 7)~1644(인조 22)

자(字)는 명보(明甫). 호(號)는 양전헌(兩傳軒). 생원(生員). 의절과 충절이 있어 희능참봉이 됨. 성재정을 짓고 학문을 강학(講學)하였음.

*채  용(蔡  容 : 十八世.少監)  1556(명종 11)~1625(인조 3)

자(字)는 자수(子受). 호(號)는 관곡(寬谷) 가정(嘉靖).  

생원(生員) 문과급제(文科及第) 공홍도(公洪道) 도사(都事) 영암군수(靈岩郡守) 나주진관(羅州鎭管)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역임.

*채득기(蔡得沂 : 十八世.少監)  1604(선조 37)~1646(인조 24)

자(字)는 영이(詠而). 호(號)는 우담(雩潭) 또는 학정(鶴汀).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였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고 천문지리(天文地理) 의약복서(醫藥卜筮) 음률병진(音律兵陣)등도 밝았다. 1636년(인조14) 천문을 관측하여 병자호란을 예측 상주 경천대(擎天臺)에 들어가 출입을 끊고 독서에 전심했다. 병자호란 후 심양에 볼모로 가는 왕자들을 호종하라는 왕명에 병을 이유로 나가지 않아 3년 동안 보은(報恩)에서 유배생활을 한 후 풀려 나와 봉산별곡(鳳山別曲)을 짓고 심양에 가서 세자 일행을 호종하였다. 이때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으려 하는 봉림대군(효종)에게 태공의 병법을 전하고 그와 함께 돌아왔다. 1798년(정조 22)에 집의(執義)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상주 웅연서원(熊淵書院)에 배향함.

*채몽연(蔡夢硯 : 十八世.少監)  1561(명종 16)~1638(인조 16)

자(字)는 정응(靜應). 호(號)는 투암(投巖).

조선조 때 학자로서 후진교육에 힘썼으며 효행이 지극했다.

*채득강(蔡得江 : 十八世.少監)  1574(선조 7)~1660(현종 1)

자(字)는 이영 또는달원(而永.達遠). 호(號)는 서제 또는 간제(西齊.澗齊).

임란공신(壬亂功臣) 수직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음.

근암서당(近巖書堂)을 창건하였으며 후에 영빈서당(潁濱書堂)으로 개칭

*채득호(蔡得湖 : 十八世.少監)  1578(선조 11)~1659(효종 10)

자(字)는 이원(而遠). 호(號)는 양애(陽崖) 또는 부벽정(浮碧亭).

조선조에서 참봉(參奉: 禧陵.司饔院.典獄)을 지내다.

*채득렴(蔡得濂 : 十八世.少監)  1582(선조 15)~ ?

자(字)는 이정(而淨). 호(號)는 암제(巖齊). 진용교위(進勇校尉)를 지냄.

*채몽익(蔡夢翼 : 十九世.少監)  1585(선조 18)~1647(인조 25)

자(字)는 덕서(德瑞). 무과급제(武科及第).

충무위(忠武衛) 강령 현감(縣監) 영장병마절제사(營將兵馬節制使)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채몽정(蔡夢井 : 十九世.少監)  1583(선조 16)~1643(인조 21)

자(字)는 운서(雲瑞). 호(號)는 석포(石浦). 부사과(副司果)를 지냈음

*채이항(蔡以恒 : 十九世.少監)  1596(선조 29)~1666(현종 7)

자(字)는 여구(汝久). 호(號)는 오봉(五峯). 시호(諡號)는 경헌(景憲).

1624(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공주로 피난시 국왕을 호종(扈從)하였으며 병자호란에 창의 척화상소(斥和上疏)를 올림. 척화신(斥和臣)으로 잡혀 청음 김상헌(金尙憲) 회곡 조한영(趙漢英)과 함께 청나라 심양에서 3년간 옥고(獄苦) 끝에 귀환하였음. 선공감역(善工監役) 내자주부(內資主簿) 목천 석성현감(木川 石城縣監) 사복판관(司僕判官)을 거쳐 평시서령(平市署令)을 지내다. 증직(贈職)은 1775년(영조 51)에 이조판서(吏曹判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제수(除授)받았으며 1781년(정조 5)에 경헌(景憲)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음. 율봉사(栗峰祠) 오봉사(五峯祠)에서 배향하며 비문은 조선조 때 영상을 지낸 문곡 김수항(金壽恒)짓고 신도비명은 국사편찬위원장 박영석(朴永錫)지음. 행장(行狀)은 시직(侍直) 조세붕(趙世鵬)이 지음. 오봉실기(五峯實記) 간행(刊行)

*채  무(蔡  楙 : 十九世.少監)  1588(선조 21)~1670(현종 11)

자(字)는 자후(子後). 호(號)는 백포(栢浦).

진사에 합격하여 병조좌랑을 역임하다.

*채  영(蔡  領 : 十九世.少監)  1642(인조 20)~ ?

자(字)는 원경(元卿).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다.

*채지연(蔡之沇 : 二十世.少監)  1611(광해 3)~1693(숙종 19)

자(字)는 제이(濟而). 호(號)는 만휴당(晩休堂).

생원(生員) 문과급제(文科及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다.

*채지면(蔡之沔 : 二十世.少監)  1639(인조 17)~1689(숙종 15)

자(字)는 한경(漢卿). 호(號)는 수암(漱庵).

생원(生員) 장원서별검(掌苑署別檢)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일생을 학문에 전염하였다. 송시열 송준길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글씨에 능했고 주자학에 밝았다.

*채지홍(蔡之洪 : 二十世.少監)  1683(숙종 9)~1741(영조 17)

자(字)는 군범(君範). 호(號)는 봉암(鳳巖).

권수암(權遂庵)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남. 영조때 사부겸 경연관자의(經筵官諮議) 1845년(헌종 11)에 대사헌좨주(大司憲祭酒)에 추증됨

*채헌징(蔡獻徵 : 二十一世.少監) 1648(인조 26)~1726(영조 2)

자(字)는 문수(文叟). 호(號)는 우헌(愚獻).

영해도호부사(寧海都護府使) 좌필선(左弼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충좌위(忠佐衛) 사과(司果)를 역임.

*채징휴(蔡徵休 : 二十一世.少監) 1684(숙종 10)~1747(영조 23)

자(字)는 조응(祖應). 호(號)는 간재(艮齋).   

학문이 뛰어나고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채하징(蔡河徵 : 二十一世.少監) 1619(광해 11)~1687(숙종 13)

자(字)는 희서(羲瑞). 호(號)는 취암(翠巖).  주부(主簿)를 지내다.

*채형구(蔡荊龜 : 二十一世.少監) 1652(효종 3)~1723(경종 3)

자(字)는 석여(錫予). 호(號)는 자목당(自牧堂).

학문이 뛰어나 학자로서 유명하였으며 후학을 양성하고 장려하였음.  

*채명천(蔡命千 : 二十二世.少監) 1697(숙종 23)~1782(정조 6)

자(字)는 노여(老與).

진사(進士) 사능참봉(思陵參奉)을 거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전설사 별검(典設司 別檢)을 지냈으며 쾌재정(快哉亭)을 중건(重建)하였음.

*채명보(蔡命寶 : 二十二世.少監) 1683(숙종 9)~1733(영조 9)

자(字)는 성여(聖與).  생원(生員)에 3등으로 합격하여 55명이 퇴학에서 13년 간 수학한 후 5명이 선발되 권지정자(權知正字)에 등용됨.

*채구장(蔡九章 : 二十二世.少監) 1684(숙종 10)~1743(영조 19)

자(字)는 천칙(天則). 호(號)는 운와(耘窩).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서 시와 문장이 뛰어났다.

*채  형(蔡  炯 : 二十三世.少監) 1696(숙종 22)~1780(정조 4)

자(字)는 해여(海如). 호(號)는 인제(認齊).

효행이 지극하였으며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채  식(蔡  湜 : 二十三世.少監) 1696(숙종 22)~1768(영조 44)

자(字)는 원징(元澄). 호(號)는 후천(後川).

진사(進士)를 지냈으며 문인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다.

*채경우(蔡景禹 : 二十三世.少監) 1722(경종 2)~1783(정조 7)

자(字)는 성락(成洛).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채성우(蔡性禹 : 二十六世.少監) 1805(순조 5)~1898(광무 2)

자(字)는 성구(聖九). 호(號)는 양고(陽皐).

학자로서 학문이 깊고 덕망과 명망이 있었음.

*채광우(蔡光禹 : 二十六世.少監) 1786(정조 10)~1857(철종 8)

자(字)는 현여(顯女). 호(號)는 직서(稷西) 또는 부암(負岩).

생원(生員)으로서 글을 잘 하였으며 정입제(鄭立齊) 등과 교유를 했음.

*채장헌(蔡章獻 : 二十六世.少監) 1819(순조 19)~1857(철종 8)

자(字)는 유문(幼文). 호(號)는 직하(稷下).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지냈다.

*채장오(蔡章五 : 二十六世.少監) 1824(순조 24)~1896(건양 1)

자(字)는 경휴(景休). 호(號)는 침간(枕澗).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정언(正言)을 지냈다.

*채상덕(蔡相悳 : 二十六世.水使) 1862(철종 13)~1925(왜정 15)

자(字)는 권일(權一). 호(號)는 심호(深湖).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맺어지자 최익현의 뒤를 따라 의병을 모집하여 황해도 일대에서 항전하였으며. 그 후 만주로 망명하여 1922년 통군부(統軍府)를 조직 총장이 되었으나 통군부의 내분으로 다시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여 총장에 추대되었다. 1925년 2월 육군주만참의부 (陸軍駐滿參議府)군대가 일본군에게 참패하자 만주안현고마령(滿洲安縣古馬嶺)에서 자결했다.

*채기중(蔡基中 : 二十八世.少監) 1873(고종 10)~1921(왜정 11)

27세 헌낙(憲洛)의 5자로서 경북 영주(慶北 榮州)에서 태어나 1913년 풍기(豊基)에서 유창순, 유장렬, 정만교, 김상옥 등과 비밀결사(秘密結社)인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을 조직하고 1916년 노백린, 김좌진, 기명섭등을 규합 광복단(光復團)이라 개칭하여 군자금의 모금과 친일반역자(親日叛逆者) 및 악질 관공리의 응징을 꾀했다.

1917년 친일 부호의 처단을 위하여 채기중과 임세규는 칠곡에서 장승원(張承遠)을 사살하고 김한종은 아산에서, 이병호는 보성에서, 한훈은 무교에서 큰 성과를 올려 대한광복단의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그러나 1918년 불행하게도 이탈자의 밀고로 전국의 조직망이 발각되고 수많은 의사들과 함께 일제의 형장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그러나 그 유지는 헛되지 아니하여 다음해 3․1만세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고 남은 단원들은 계속하여 수비단 암살단, 의열단 등에 흩어져 광복을 하기까지 일제와 피를 흘렸다.

이 고귀한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손만대에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에 “대한광복단기념공원”이 조성중에 있는바 수년내에 완공예정이다. 광복후 1963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추서되었다.

*채홍의(蔡鴻儀 : 二十九世.少監) 1869(고종 6)~1945(광복 1)

자(字)는 순칙(順則). 호(號)는 저헌(樗軒).

탁지부참서 세무관(度支部參書 稅務官)을 지냈다.